우리들의 맏형 고 이시화 장로님을 추모하며.
우리단의 큰형님 이시화 장로님은 1909년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에서 태어나 지난 7월 18일 소천 하셨으니 그야 말로 현대인의 희망 사항 "구구팔팔이삼사"의 생을 맞추시고 하나님 나라에 가신 것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 어려웠던 격변의 세월, 전화와 기근의 한 가운데서 그를 지탱 했고 장수의 복을 누릴 수 있었든 것은 오로지 “나는 항상 찬양하며 살리라”고 늘 외치며 간증 해온 그의 삶의 결실이었다.
그의 삶을 잠시 드려다 본다면 산골 농군의 둘째로 태어나 오직 고학으로 숭실전문학교와 동경 청산학원에 모두 졸업은 못 했으나 그 당시 신문학에 취학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 전도사였든 고모의 권유에 따랐으며 고모의 손에 이끌리어 주일학교에 출석 했고 자연스럽게 찬양의 생활이 시작 되었다.
또한 한날에는 수 십리 되는 교회의 저녁예배를 드리고 고모와 함께 귀가 하는 길에 한 으슥한 골짜기를 지날 때 건너편 큰 나무위에 훌라후프 모양의 파란불이 걸린 것이 보였다. 무서워 어쩔 줄을 모르는데 고모가 하시는 말씀이 “시화야 그 따위 귀신은 무서워 하지마라, 찬송 부르자”, 고모 따라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니 불빛이 사라 졌다.
이렇게 찬송의 위력을 체험한 뒤로는 먼 산길을 오갈 때 마다 찬송을 부르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고 그것이 찬송 생활의 시작이었다고 하셨다. 생활 터전을 찾아 한때는 만주로 조그만 사업을 펼치면서도 생업은 부인에게 맡기고 교회개척 계몽사업 등, 가는 곳 마다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며 일생을 살아 오셨다.
서울 자양동에 있는 원일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고 교회를 섬겨오며 늦은 나이에 숭실전문 재학 시절 전도대에서 트럼본을 불어본 경험도 있어서 다시 트럼펫을 배워 친구 장로 몇 분과 4중주단을 만들어 교도소를 비롯해 소외된 곳을 찾아 수년간 연주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나 건강상 이유로 자녀들이 만류해, 오카리나, 아코디온으로 바꾸어 가며 연주 생활을 멈추지 않았고 1985년 10월에 한국장로성가단에 입단 후 일본 순회 연주 시 지휘자의 권유로 보혈의 찬송을 독창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공식집계가 131회 나 독창을 하셨고 또 성종남성중창단에 십 수 년 간 몸담아 활동 하는 등 그의 삶은 온전히 찬양의 삶이였다.
기억력이 뛰어나 새 단원까지도 인사 할 때 마다 정확히 이름을 불러주신다. 특히 나에게는 우리 아내의 이름 까지도 부러 주시며 나를 놀라게 했다.
근년에는 이사야 53장 마태복음1장을 특순으로 암송하기도 하셨다.
멀리 보여도 달려가 만나고 싶은 분,
천진난만한 꿈임이 없어 항상 만만하신 분,
뵙기만 해도 은혜가 넘치는 분,
어디를 가나 보혈의 찬송으로 만장한 청중들의 눈물과 기립 박수를 받을 때면 의래 하늘 높이 두 손을 처 들며 이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특유의 멋진 세레머니~!
이제는 그 모든 것 다시는 볼 수 없으니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단의 큰 형님이신 이시화 장로님~!!
그는 확실히 우리 한국장로성가단의 모델이며 희망이었다.
그 이름, 보혈의 찬송과 함께 영원히 기억 될 것입니다.
<<자서전 "나는 항상 주를 찬양하며 살리라." 에서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