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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야 산다 / 황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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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순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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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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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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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야 산다 / 황대연

용서해야 산다
2년 전,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명분으로 교회의 남정네들을 부추겨서 7명을 아버지학교에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머뭇거리는 그들에게 담임목사인 나도 함께 들어가며 “나를 따르라!”했고, 교회에서는 아버지학교 등록금중 절반을 지원하며 이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니, 마치 이라크 파병하는 무슨 평화유지군처럼 사뭇 비장한 분위기마저 감돌았습니다.
아버지학교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모이는 그야말로 이 시대 아버지들의 모임인데, 강의와 또 다른 아버지들의 사례 간증을 통해, 그리고 매주 마다 내 주는 숙제와 그 숙제의 결과물들을 소그룹 안에서 발표도 하고, 솔직하게 나누는 시간들을 통해 일그러진 아버지의 모습들을 스스로 발견하고, 참된 아버지상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하고 가정을 살리는 데 초점을 둔 5주간의 프로그램입니다.
처음 제가 했던 숙제는 <아버지께 편지쓰기>였습니다. ‘까짓 편지쯤이야... ’ 쉽게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 편지지를 펴 놓고, “아버지께...”라고 첫 문장을 썼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다음 쓸 말이 한마디도 생각이 나질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학교에서 요구하는 편지의 형식은 아버지와 함께 즐거웠던 추억들을 담아서 쓰면서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것이었는데, 저는 아버지와 즐거웠던 추억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즐거웠던 추억이 하나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가라앉은 돼지뜨물통을 휘저어 놓은 듯, 갑자기 나의 기억 저 아래 묻혀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들이 마구 떠오르는 것입니다. 술 마시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버지, 밥상을 둘러 메치는 아버지,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 마침내 어머니와 이혼해 버린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두려워 집 바깥 담장아래 앉아 아버지 잠들기를 기다리던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생각이 나자 저는 편지지를 구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저는 아버지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하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도록 편지를 쓰지 못하고, 새벽 기도회 때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묻어 놓은 나의 분노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삼십년이 넘은 세월이 지났고, 이제는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 있는데, 왜 이제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들에 시달려야 하는지! 그러다가 ‘어차피 형식일 뿐이야... 의례적인 편지를 한 장 써가면 되지. 숙제는 해야 하니까.’ 하는 마음으로 다시 편지지 앞에 앉았습니다.
“아버지께...,” 또 다시 막히는 편지지.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아버지와 함께 가진 추억이 이렇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생각나게 해 주세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저는 앞으로 목회를 못할 것 같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가 아스라이 기억의 저 편 속에 한 가지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제가 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극장을 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제목도 생각이 났습니다. “월하의 공동묘지”(아버지는 어린애를 데리고 하필 왜 그렇게 무서운 영화를 보러 가셨는지!) 그리고 당시 영화 두편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어서 또 하나는 무슨 중국 무술영화였는데, 두 개다 매우 무서웠던 영화로 기억합니다. 그것이 무뚝뚝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유일한 기억이었습니다. 저는 이 기억을 편지에다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영화... 무서웠지만, 아버지가 옆에 계셔서 별것 아닌 것이 되었었노라고...
그렇게 쓰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제게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저희는 저지대에 상습 침수지역인 서울 상암동에 살았었는데, 비가 무척 많이 쏟아지고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 깊은 밤, 어디선가 “뚝방이 터졌다아~!!”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우리 자는 방의 지붕이 날아간 것입니다. 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흙탕물을 거의 반사적으로 아버지가 우리 두 남매를 몸으로 덮어서 당신 몸으로 받아내시던 장면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태풍이 온 것이고, 저희 집을 포함한 상암동 일대의 한 마을은 한강물이 범람하고 난지도 뚝방이 터져 물에 잠긴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떠오르자 편지를 쓰다가 울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살아오신 세월이 험하신 것이고, 아버지 역시 아버지로써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며 사셔야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신 것뿐입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모두들 살기 어려웠던 그 시대가 아버지로 하여금 좌절케 했고, 아버지는 술로 푸시고자 했지만, 더욱 고통스러우셨던 것입니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있는 저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불쌍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한 페이지만 형식적으로 쓰고 말겠다는 편지지는 벌써 다섯 장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학교 편지쓰기 숙제를 해갔는데... 읽고 돌려주겠다더니 우리 조의 조장은 그 편지를 아버지의 주소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아 이런! 하지만,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정확히 이틀 후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애비야! 너 아버지께 무슨 편지를 썼니?”
“왜요?”
“네 아버지 그 편지 받고 우시더라...”
저는 그 길로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느 때부터인가 내가 장성하면서부터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대화의 자리에서도 남의 이야기처럼 듣고, 남의 이야기하듯 당신의 의사표현을 하시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저대로 대충 알아듣고 대충 허공에다 이야기 하면 그렇게 알아들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응?”
“편지 받으셨어요?”
“...응”
그게 전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울컥해서 아버지를 껴안았습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를 너무 미워했어요.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워서... ”
아버지도 조금씩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크고 두렵게 느껴졌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제 품에는 작고 연약한 노인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내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뚝!”하고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밀려드는 환희, 기쁨...
저는 지금도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날 이후 세상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들이 조금 더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와의 대화도 열렸고,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쉬는 날에는 분주한 목회일정이지만, 가능하면 아버지 모시고 아버지 좋아하시는 소래포구에 가서 회도 먹고 바닷바람도 쐬려고 노력합니다.
지난 설날도, 그리고 이번 추석도 온 가족이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다시금 드는 생각은 “용서해야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 황대연 / 한가족교회 목사 - http://www.hangaj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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