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가 발생하면, 화상으로 숨지는 사람 보다
연기나 유독가스에 질식하여,
숨지는 경우가 더 많다.
다시말하면 눈에 보이는 불 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연기가 더 위험하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지고 무너지는 이유를 살펴보면
핍박이나, 가난이나, 질병이나,
고난같은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다.
걱정, 낙심, 불안, 스트레스, 조급함, 안일주의, 상처,
우울한 마음,이기주의, 욕심, 탐욕과,
불순종같은 내면의 적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 실패와 넘어짐의 요인을,
외부에서만 찾으려 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누구때문에..무엇때문에..
핑계를 대며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의 대적은 내안에 있으며, 성경은 언제나,
모든 문제의 촛점을 나에게 맞추고 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학교에서 대적하기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불레셋 군대나 아말렉 군대가 아니었다.
자신들 속에, 처리되지 않은 욕심과
애굽의 근성이었던과 같은 것이다.
누가 뭐라 하는가?
스스로 힘들어 하고, 스스로 약해지고,
스스로 섭섭해 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누가 건들기라도 했는가?
스스로 화나고 스스로 열등감에 시달리고,
스스로 애굽의 고기가마를 그리워 하는 것이다.
가나안을 향하여 가면서도,
애굽의 근성이 처리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내면의 적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것을 볼수 있다.
무엇과 같은가 하면 불길은 잡았는데,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 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홍해를 갈라 주고, 반석에서 물나게 하고,
메추라기로 고기 먹여 주면 뭐하나?
꺼지지 않은 애굽의 성향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가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옛사람이란,
애굽의 식(기질, 성향, 성품, 근성)을 말하는 것이다.
더러운 옷을 벗어야, 새옷을 입을수 있듯이
우리도 연기를 완전히 소멸해야,
또 다른 화재를 막을수 있을 것이다.
연기가 존재하는한, 언제나 화재의 위험이 있듯이
우리안에 처리하지 못한,
옛 사람의 일이나 끝없이 꿈틀거리는
'나' 라는 적을, 제어하지 못하면
우리는 '나' 라는 적에게, 희생될수도 있을지 모른다.
'나' 라는 적은, 켤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이기려 하고
죽기전에는 항복하지 않으려 하는,
철옹성 같은 것이 '나'라는 아성이다.
그곳(아성)에서
끊임없이 불신, 걱정, 불안, 염려, 불순종, 초조,
의심, 불평, 탐욕...이라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웬만한 고난과는 싸워서 넉넉히 이긴다.
불같은 시험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게 스며드는 연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일수 있다.
그 연기는
정욕일수 있다.
자만일수 있다.
자존심일수 있다.
오랜 세월 학습된 염려일수 있다.
고질적인 부정적인 생각과 언어일수 있다.
지독한 게으름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조용히 스며드는 연기를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보다 연기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아직도 연기보다 불을 더 위험하다고 믿고 사는것 같다.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외부의 적을, 내부의 적보다
위험하고 강하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사단이, 최근에 즐겨 사용하는 전략은
불보다 연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이나 연기를 끄는 것은, 오직 물이듯이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대적을,
능히 물리치고 넉넉히 승리하게 하는 첩경은
오직, 말씀과 보혈뿐이다.
(onuhara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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