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도자
어느 건설회사 사장이 쓴 수필을 읽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 1982년경 그 건설회사에서 말레이시아 페낭 대교를 맡아 완성했다. 당시 건설회사는 기공식 무대를 거창하게 준비했다.
국내에서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장과 똑같은 무대를 연출하기 위해 전문가를 말레이시아로 불러 단상을 꾸몄다. 높은 위치에 수상 부부가 앉을 커다란 의자를 배치하고, 그 양 옆으로 정부요인 및 귀빈들이 앉을 의자를 놓았다. 수상 의자 앞에는 버튼을 누르면 폭죽과 연기가 치솟는 장치도 준비했다. 햇빛이 강해서 차양도 넉넉하게 쳤고 카펫도 깔았다.
기공식 하루 전, 수상의 비서실장이 현장을 둘러보러 왔다. 그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 건설회사 관계자들은 비서실장이 기공식 준비에 감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흡족한 기분이었다. 그때 비서실장이 회사 관계자에게 다가왔다.
“수상이 앉는 데는 그늘이 있는데, 일반인 5천 명이 앉는 이 앞은 어떻게 할 겁니까?”
비서실장은 단상 앞쪽의 공터를 가리켰다. 어떻게 하다니? 한국 건설회사 관계자는 의아했다. 한국에서는 보통 대통령 앉을 자리에만 신경을 써 왔기 때문이다. 일반 참석자들은 땡볕에 줄지어 서서 대기하는 게 보통이었다.
“오천 명 참석자들 위에도 차양을 치든지, 아니면 수상 자리의 차양을 없애든지 하세요. 수상만 그늘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서실장의 단호한 지시였다. 그는 단상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이 의자 두 개는 왜 이렇게 큽니까?” “수상 각하 내외께서 앉으실 의자입니다.” 한국 건설회사 책임자가 대답했다.
“수상은 다른 사람들보다 엉덩이가 큽니까?” 그렇게 말하며 비서실장은 수상 자리에도 보통 의자를 가져다 놓도록 부탁했다.
지도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가장 좋은 모범이 되라고 《성경》에서 베드로는 편지에 쓰고 있다. 또 훌륭한 지도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는 말한다.
다음날 수상이 와서 기념연설을 했다. 말레이시아어로 열변을 토하는 중간 중간 사람들에게서 폭소가 터졌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 건설회사 관계자들은 좋은 얘기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따라 웃었다. 그걸 본 말레이시아 관료 한 사람이 한국 건설회사 대표자의 옆구리를 툭 치며 영어로 말했다.
“지금 수상이 무슨 얘기를 하는 줄 알고나 웃는 겁니까?” “수상이 뭐라고 했기에 모두들 웃는 겁니까?” 한국 회사 대표자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한국 회사가 알리바바(도둑놈)라고 지금 수상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회사가 도둑놈이니까 말레이시아 국민들이 빨리 선진 토목기술을 배워서 이 한국 도둑놈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걸 들으면서 한국 건설회사의 현지 책임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지도자는 정말 겸손하고 소박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사람은 겸허한 인품 쪽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나는 한 달 동안 유럽에 출장을 갔던 적이 있다. 그 무렵 유럽 순방을 하던 한국 대통령이 잠시 쉬기 위해 스위스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나는 우연히 제네바 한국대표부 직원들의 고생을 알게 됐다.
외교관 부인들이 대통령의 수많은 수행원들을 위해 김밥을 싸고 김치를 담그는 등 정신이 없었다.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거의 강제로 동원된 상태였다. 교민들은 환영단이 되어 대통령을 맞이하는 예행연습을 강추위 속에서 몇 차례나 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식적인 답례만 하고 호텔로 향했다. 당시 스위스 당국은 한국 대통령이 묵는 호텔 근처에 탱크를 동원하고 호수에는 함정을 배치해 달라는 요구에 고개를 갸웃했다. 스위스에서는 대통령이 전철을 타고 다녀도 아무 일이 없고 대통령 부인도 제네바 거리로 꽃을 사러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민주화가 되고 권위적인 대통령의 자리가 많이 낮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대통령은 친근한 이웃이 아니고 왕을 대하는 듯한 거리감이 있다. 청와대 건물도 사극에서 흔히 보는 왕실의 위엄이 풍긴다. 그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벌써 다음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보도되고 있다. 진실한 마음이 깃들지 않은 딱딱한 연설문을 소리쳐 읽는다. 수많은 운동원들과 기자들에 둘러싸여 시장 상인을 만나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겸손보다는 카메라가 더 의식되는 듯하다.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지도자는 겸손할 필요는 없고 겸손한 척만 하면 된다고. 그러나 국민들은 진짜를 가려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낮아지려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채우기보다는 비우려고 하는 사람을 가려내야 한다. 천대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그런 지도자들이 점점 많아졌으면 좋겠다.
필자 : 엄상익 변호사 출처 : 월간《좋은생각》 2002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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