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 한 달 있는 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3월초에 아침부터 34도를 계속 유지하는 기온이나, 1달라( 1000원)를 쓰는것이 5000원쯤 여겨져 점점 아까워지는 것만 아니라 그들의 풍습에 적응하는것 이었다. 결혼 풍습부터 180도 달랐는데 남자가 1500불 내지 3000불 정도의 지참금을 가지고 처가댁으로 장가를 가서는 분가 할 이유가 있을 때까지 계속 함께 처가살이를 사는것 이었다. 그기서 40세 가까운 노총각을 보는것은 어렵지 않다. 교사나 공무원의 봉급도 30~40불 정도이니 30전의 나이에 장가 들기가 너무 어렵다.
초,중, 고 모두 2부제 수업으로 교사나 학생 모두 오전에 마치거나, 오후에 등교 했고 학생의 결석, 교사의 결근이 큰 흠이 되지 않는 것이 이상 스러웠다. 현지에서 공장을 경영하는 한국인 사장들은 결근하고 와서도 전연 미안해 하지 않는 태도에 익숙해 지는데 애를 먹은 얘기들을 했다.
초,중,고에는 모두 음악 수업이 없었는데 캄퐁솜(캄보디아 제2의 도시로 유일한 항구 도시)의 한 중,고등학교에서 음악 특강 4시간을 갖게 된것은 행운이었고 아주 보람 있고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선교사님의 권유로 호기심 반 염려 반으로 했는데, 허락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 것이 성사된 것은 아마 우리 성덕교회가 2주 전에 의료 선교팀 40명이 하루 종일 수고하여 450명의 환자들을 치료해 주어 그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주민들로 부터 많은 칭송을 받은 답례가 아닐까 싶다.
음악특강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보니 걱정이 태산 같다. 말이 통해야지- 캄보디아어는 -좋으신 하나님-의 노래 가사 한 줄을 알 뿐이라, 할수 없이 영어로 설명하기로 했는데 실력이 넉넉지 못해 대부분을 this mark is - - - 나 this means - - - 로 시작하여 미리 매직 팬을 써서 준비해 간 괘도들을 읽으며 ( 괘도 여러곳에 컨닝 할 수 있는 문장들이 수 없이 있었음 )했는데 제법 들을 만 한 모양이었다. 염려 했던 강의 도중에 사라지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으며 Melody, Rythme, Hamony에대해 예를 들어 설명하거나 Music을 Vocal music과 Instrumental music으로 구분하여 -쁘레아 뜨롱 러나 - (좋으신 하나님의 현지어 가사)노래를 정성껒 부르고, 기악은 리코더, 하모니카, 기-타, 멜로디온, 전자 섹소폰과 전자올간으로 "좋으신 하나님"과 "예수 사랑하심은" 두곡만 번갈아 여러번 연주 했는데 어쩌면 거의 익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후에 교회에 나오면 매우 귀에 친숙함을 느낄 것이라 기대하며 연주했다.
교실 2개를 합쳐 만든 강당은 100명의 좌석으로, 첫날 오전 중학생 40명이 왔는데 오후에는 재미없다고 소문나면 안 올까 걱정했는데 50명이오더니, 이튿 날 오전엔 고등학생들이라 또 염려 했는데 60명이오고 마지막 오후엔 70명쯤 오니까 실내가 꽉 찬느낌이었다.
C D 플레이어로 합창과 독창,중창을 들려주었더니 그런 고급 음악을 잘 안들어 보아서 그런지( 내가 한달 있는동안 TV 와 래디오에서 클래식한 음악은 거의 들어보지 못함) 난해해 하더니, 내가 연주한 경쾌한 올갠곡에 트라이앵글, 탬브린, 캐스타넷으로 보조 연주를 해 보였더니 싱글 벙글이다. 음악의 이해에는 다른 언어가 더 필요하지 않았다.
음악이 직업을 얻는데(돈 벌이에) 도움되지 않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현지 교사의 말에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모든 내용을 열심히 필기하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으니 보람되기도 했다.
특강 중간과 마지막에 여러번 두가지 영어 문장을 반복해 주었다. 몇 년 후 Poor 한 경제 사정이 more rich 해 지면 여러분 나라에도 세계 모든 나라 처럼 Music Lesson 이 생길것 이라고, 또 모든 음악은 항상 Church Music 에 의해 발달해 왔으므로 교회의 찬송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우리 한국도 50년쯤 전 가난 하였을 때는 음악을 중시 하지아니 하였고, 그때도 모든 음악이 교회에서는 귀중하게 대접받고 쓰임 받았음을 기억했다.
나는 짧은 영어 실력뿐이었지만 그러나 캄보디아는 우리나라 보다 영어 공부에 대한 의욕이 강하고( 영어실력= 좋은 직장 의 생각때문) 또 회화 중심의 영어 수업이라서 내뜻이 어느 정도는 전달 되었으리라 짐작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려던 목표에는 얼마나 접근 했는지는 자신이 없다. 그래도 4시간 모두 크메르어로 시작 기도를해 주시고 참관하신 선교사님은 대단하다고 나를 위로하며 추켜 세웠다. 화학전공자인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애먹고 음악교사 자격증을 얻은 후 교사생활 38년중 겨우 시골 1년 대구 시내 1년 밖에 못 써 먹었는데 오랫만에 그걸 써 먹은 셈이다. 이곳 교장의 허가를 받는데는 어쩌면 나의 교장 자격증보다는 음악교사 자격증이 더 위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루 10불 짜리 장급 여관 같은 호텔이었지만 에어컨은 추울 정도 였고, 매일 식사후 당도가 한국보다 두배 가까이 높은 파인애플, 우리나라의 반의 반 값 이하인 토마토,옥수수와 이름도 다 기억 못 할 많은 열대 과일들을 맛있게 먹은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다만 앞 차가 너무 느려 좀 빨리 가자고 경적을 울렸다가 총을 맞고 죽은 얘기( 최근 실화--그 나라에는 아직도 총을 소지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 나 외국인은 최소한 10달라 이상은 소지했다고 생각하므로 밤중에 길을 가다가 3달라를 빼았기고 강도 살인을 당한 외국인 얘기들은 빨리 잊고 싶다.
한 달에 90달라 정도는 가져야 생활 할 수 있는 교사나 공무원은 30달라 봉급으로 부족하여 항상 둘 이상의 복수 직업을 가지거나 부정한 방법의 수입을 얻는데도 별로 주저함이 없는듯 하다. 교사는 교과서 보다 프린트 교재를 팔아서 수입이 생기는 강의와 자주 모의 고사지를 팔아서 수입을 얻는 방법을 선호하고, 군인도 아르바이트를 한다니 이해가 가지 않더니 대개의 군인이 폴포트 정권을 축출 할때 합력하여 싸워 이긴 장성 개인의 사병이며 다른 장성의 부하들 끼리는 마치 다른 회사원 끼리 상하가 없듯이 남남이나 같다니 아직도 믿기 어렵다.
이 나라는 확실하게 자기 잘못이 드러나도 인정을 하는 습관이 없는데, 그 유래는 폴포트 정권때 1분짜리 즉결 심판에 희생된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때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즉시 찔려 죽었는데 이것이 기독교의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용서받는 귀한 진리를 받아들임에 매우 큰 방해가 되고 있다고 한다. 자기 죄를 깨닫지 못 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김선교사님의 태권도 사역에 수년을 함께 같이 일한 스탭들( 이들은 월급을 받고 있으며 공중기도를 매우 잘 함)이 신앙의 폭이 어느 단계를 넘지 못 함이 느껴 졌다. 선교사님은 칭찬을 잘 해 줄 수가 없다는데 칭찬해 주면 즉시 월급을 올려 달라고 요구 한다고 한다.
그러나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우리나라처럼 순수하게 신앙이 자라고 있어 나도 선교사님 부부와 같이 그들에게 큰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어른 들의 사고와 습관들도 바뀔 수 있으리라.
어두운 저녁 따뜻한 바다물에서 현지의 한국 사장님(선교사님 교회의 교인)과 두번 야간에 수영하였는데 정말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물 밖에 나오면 바람이 약간 불어 추워도 따뜻한 물속에서는 한 시간도 싫지 않았다. 물에서 나오면 수영복도 아닌 펜티는 벗어 물을 짜서 입지 않고 두고는, 막바로 바지만 입으면 다 였다.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나면 잠시 써늘 하기도 하였는데 아마도 올해는 더운 여름을 두번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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