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임재와 영적승리 / 정원 목사
신앙은 한쪽 측면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으며 여기에는 경배, 순종, 헌신, 누림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신앙의 다른 한쪽에는 마귀, 세상이 있으며 이는 전투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부분적으로 누림이며 부분적으로 전쟁인 것입니다.
이 영적 전쟁에는 균형 잡힌 시각과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부분에서 이 영적 전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도 빠짐없이 '이기는 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영적 전쟁에 대하여 아주 무지하거나 개념적으로만 파악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이 마귀와의 싸움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극단은 믿음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이며 균형과 조화 속에서 영적 전쟁은 수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하고 영적인 경험을 많이 한 분일수록 이 영적 전쟁에 지나치게 민감한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오히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별로 하지 않거나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 보다 많이 속을 수 있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영적 전쟁 노이로제의 한 극단적인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 사역자 두명이 그들의 사역을 위하여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한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방의 열쇠를 받은 후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방문이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방문의 손잡이가 너무 미끄러웠던 것입니다.
한 사역자가 동료에게 말했습니다.
"형제, 우리 같이 기도해야 하겠소. 마귀가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기 위하여 역사하고 있는 것 같소. 같이 마귀를 쫓읍시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며 마귀를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은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이 말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나에게 맡겨 보십시오."
그리고는 그는 손잡이를 잠시 어루만지는 것 같더니 쉽게 문을 열었습니다.
앞의 사역자는 환성을 터뜨렸습니다.
"대단하군요! 마귀의 역사를 그렇게 쉽게 물리치다니! 정말 당신은 신령한 사역자요. 도대체 어떻게 한거요?"
동료는 부끄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신령하기는요... 문의 손잡이에 기름이 묻어 있기에 휴지를 꺼내서 닦았지요. 그러니까 잘 열리더군요."
이 이야기가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들리겠지요? 그러나 나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많이 접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욱 더 신령해 질수록 바보가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과 멀어질수록 우리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잃어버리고 경직되고 긴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혼의 실상이 아닌 형식이나 개념, 원리에 지나치게 몰두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지 않고 묶여지게 됩니다.
특히 주님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마귀와 그의 실재에 초점을 맞추고 대적과의 싸움에만 몰입하게 되면 우리는 강하고 이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쫓기게 되며 긴장되고 여유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현상에 몹시 민감한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체험을 좋아하는 이러한 성향은 기질이나 사명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어떤 사람은 생각이 많고, 어떤 이는 느낌과 감상이 많으며 어떤 이는 행동이 많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깨닫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감동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움직이려고 하며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때부터 어떤 이는 진리 적이며, 어떤 이는 정서적이며 어떤 이는 행동적입니다.
영적인 느낌과 분위기, 체험을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기질과 연관이 있습니다.
지적인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다 부분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지적인 사람의 냉철함, 차가움은 정서적인 사람의 따뜻함과 행동적인 사람의 열정으로 보완될 수 있으며 정서적인 사람의 변덕스러움은 진리 적인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서 세워질 수 있습니다.
행동적인 사람도 일을 벌이기에 앞서 깨달음과 사랑, 의미 등을 진리 적인 사람과 정서적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영적인 분위기와 영적 현상에 몹시 민감해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항상 그들의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서 악한 영이 그들을 누르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예배를 시작할 때마다 모든 성도들에게 머리를 숙이게 하고 예수 이름으로 악한 영을 꾸짖는 기도를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오늘 성도들에게 붙어있는 악한 영과 이 곳에 와 있는 마귀들은 떠나갈 지어다!"
그는 이것을 힘차게 여러 번 반복했고, 그러면 성도들은 뭔가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고 시원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집요한 공격은 예배 때마다 반복되었고 그리하여 마귀를 쫓아내는 시간은 조금씩 더 길어졌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A목사야, 왜 너는 나를 예배하지 않고, 마귀를 예배하고 있느냐?"
물론 그 목사님은 기절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의했습니다.
"주님, 마귀를 예배하다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오직 주님만을 예배할 뿐입니다."
"너는 예배를 드리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게 한 후 마귀의 능력과 임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너는 그럴 의도가 없겠지만 마귀는 이것을 자기에 대한 예배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너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마귀들이 예배를 받기 위해 너희에게로 모여들고 있다."
목사님은 기가 막혀서 졸도할 지경이었지만 마귀를 대적할 때마다 그때뿐이었고, 그들의 압력이 점점 더 커졌던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목사님은 울부짖듯이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주님! 정말 너무 죄송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의 관심을 마귀에게 지나치게 쏟지 말아라. 나는 십자가에서 이미 그들을 모두 처리했느니라. 너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라. 나만을 찬양하라. 그리할 때 마귀는 너희를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들의 예배는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억압이나 부자유가 있더라도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살아 계심과 그분의 승리를 찬양했습니다.
그분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높여드렸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느낌이 없을 때에도 주님의 임재를 바라보았습니다.
점차로 그들의 예배에서 압박감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귀를 무시하고 오직 주님의 임재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마귀는 더 이상 그들의 관심을 끌거나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공격이나 방해에 대해서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며 가만히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영적 전쟁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다만 진정한 영적 전쟁의 승리는 하루종일 마귀와 싸우며 큰 목소리를 내고 침을 튀기며 흥분과 열정과 담대함을 가지는 것.. 오직 그러한 방식으로만 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 믿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께 고정시킬 때,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무한한 은혜를 주시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임재하시고 찾아오시는 그 영광의 주님을 높여드릴 때, 그 사랑의 주님께 사랑을 고백할 때 진정한 승리는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긴장하고 흥분하고 싸워도 패배할 수가 있으며 그저 부드럽고 고요하게 안식을 취하여도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 우리는 아름답고 따뜻한 주님의 사랑 가운데 더 깊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영성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중에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