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대부흥' 세 가지 전제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한달 여 앞두고 각 교단과 전국의 교회가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를 위한 조직을 마친지 이미 오래다. 그리고 전국을 돌면서 경쟁적으로 집회를 모색하기도 하고 이미 시작한 단체나 교단과 교회가 눈에 많이 띈다. 이러한 분위기에 우리 교단과 교회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왠지 이러한 분위기를 바라보면서 뭔가 진정 중요한 것이 빠지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1907년을 기준으로 '평양 대부흥 100주년'이라는 숫자에 너무 집착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0주년이라는 숫자를 기억하고 그때의 은혜를 다시 사모하고 목말라 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한국교회는 지난 역사를 기억하면서 그 때의 정신과 기름 부으심을 다시 바라야 할 때이다.
문제는 지금 이러한 상태로 그날을 준비하다가는 또 한번 일회성 행사나 소모적인 이벤트성 행사로 그칠 개연성이 농후 하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이미 아는 바와 같이 한국교회는 교회구조의 경직성과 피로현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통계의 지표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문제의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돈의 위세가 교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둘째는, 교계 지도층의 윤리적인 타락과 무감각성이다.
그리고 셋째는, 강단의 세속적인 야합과 타락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세 가지 한국교회의 문제의 심각성의 한 복판에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피할 수 없는 장본인들이라는 점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는 어떤 부흥을 위한 몸부림도 전혀 의미 없다. 아까운 시간과 재정만 낭비할 뿐이다.
평양 대부흥과 같은 부흥을 우리 모두가 진정 원한다면 성도들을 동원하고 다그치고 피곤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목사와 장로들만을 위한 회개운동과 기도회가 먼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907년 평양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903년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국에서 부흥운동이 실질적으로 처음 목도되기 시작된 것은 1903년이었다. 한국의 동해안 원산의 하디(Robert Hardie) 선교사가 선교사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며 진행한 작은 기도회에서부터 먼저 기도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촉매제가 되어 1904년 한 해 동안에 1만 명의 한국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렇게 번져간 기도의 불씨는 1906년까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천지를 흔드는 영적인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된다.
드디어 1907년 1월 첫 주가 왔다. 그 주일 저녁 약 1500명의 사람들이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였다. 그들 위에 온 하늘이 불로 덮은듯 했다. 이때에 그 교회의 지도자인 길선주 장로는 청중 한 가운데 일어서서 모든 사람들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 임종을 앞둔 한 나의 친구가 나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 '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나는 '걱정 마오, 내 그렇게 해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나는 미망인의 돈 100달러를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방해했으며, 100달러를 내일 아침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100년 전 평양 대부흥은 하나의 '운동'이 아니었다. 한 지도자의 통렬한 회개로 점화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 순간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이 모든 계층의 담과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는 순간이었다. 100년전 평양에 있었던 부흥은 지도자들이 먼저 말씀에 대한 허기와 목마름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것이 기도로 녹아지면서 지도자들의 앞선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한 달여 남겨둔 이제라도 비본질적인 행사성 모임을 기획하기 보다는 우리 목사와 장로들이 먼저 한주간 만이라도 일상의 삶과 목회를 철폐하고라도 잊혀져가는 기도의 산상에 올라 잘못 충성 했던 섬김의 시간을 짐승의 울음소리로 통회 자복하는 회개와 건강하고 바른 말씀 전하기 운동으로 재점화 되어야 한다.
- 2006년 12월 15일 송태근 목사 (강남교회)
- 교회 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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