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주님 앞에 소인배에 불과했습니다."
예로부터 동양권에서는 사람의 됨됨이를 그릇에 비유했다.
세상을 다 품고 우주를 담을 만큼 큰 그릇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그릇이 대추씨만도 못해서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큰 그릇의 사람을 대인이라고 부르고 작은 그릇의 사람을 소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대인과 소인의 진정한 차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대인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데 비하여 소인은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한다. 대인은 자신의 잘못이나 결함을 잘 찾아내는데 비하여 소인은 남의 흠이나 약점을 잘 파헤친다.
대인은 상대방을 세워주고, 인정해 주고, 격려해주는 법을 먼저 생각하고 소인은 상대를 쓰러트리는데 남 다른 소질이 있고, 그 법을 잘 알고 있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는 또한 공동체 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대인은 화합하고, 연합하는데서 기쁨을 찾고, 또 그 기쁨을 느끼지만
소인은 이간과 분열을 꾀하는데 더 큰 습성을 가지고 있다.
또 대인은 공동체의 덕을 세워가지만, 소인은 공동체를 힘들게 한다.
그래서 대인을 그야말로 대인이라고 존경의 의미로 부르지만, 소인은 소인배라고 낮잡아 말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뒤 우리의 신앙은 점점 자라나고 성숙되어 가야한다. 신앙성숙의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우리 사람됨의 그릇이 커지는 것이다. 예수를 닮은 큰 그릇으로 변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도 있고, 이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도 미칠 수 있다.
성경 누가복음 7장 28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사도 요한을 이렇게 큰 자라고 했을까?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던 사람이다.
"나는 주의 길을 곧게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라고 자기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정립한 사람이다.
또 그는 겸손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했다.
예수님을 자기의 주인처럼 높이셨고 자기를 종처럼 낮춘 겸손의 사람이었다.
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했다.
그야말로 남을 낫게 여기며 인정해 주고 축하해주는 사람이 곧 겸손의 사람이다.
며칠전 교회 선배의 권유로 읽게 된 육이 죽어 영이 산 사람 (후꾸시게 다카시)의 간증을 읽었다.
이 책은 거룩한 목사 복을 입고, 장로직분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그야말로 영이 죽은 분들이 한국교회에 너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카시가 바라본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이 균형을 잃은 조직처럼 변해진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지적하였고, 특히 종교권력이 팽배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교회가 빈틈없는 조직이나 행정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도 찬양하는 순례자이기 전에 어쩌면 예수한테 미친 사람들의 모임이다. 성령이 지배하는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는 삶이라고 묵상한다.
"주여!
저도 주님 앞에 소인배에 불과했습니다.
부족한 저를 이 시간 용서하여 주옵시고
푸른 초장으로 날 인도 하옵소서..."
- 한국장로성가단 홈피의 글(손영보 장로)을 재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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