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척 담장 너머로 희망을 띄우는 여자
내 나이 열한 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갔다. 아버지의 후처였던 엄마는 날마다 술에 취해 집안 살림을 부수고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배고픔으로 겨울 바닷가를 헤매며 남의 집 대문을 기웃거리다가 밥을 얻어먹곤 했다. 배고픔보다 더 큰 서러움은 엄마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때 자퇴를 하고 나는 열여섯 살 때까지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글씨도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밤마다 눈물로 일기를 썼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이복오빠로부터 성폭행까지 당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데 나만 버려졌다는 절망감으로 울고 또 울었다. 이렇게 태어난 내 운명이 저주스러웠다.그 후 가까스로 엄마를 다시 만났다. 높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깊은 산골 오두막에서 우리는 약초를 캐며 살았다. 산나물을 뜯고, 작은 텃밭도 일구었지만 배움과는 먼 생활이었다. 그토록 그리웠던 엄마 품에서 살게 되었지만 나에겐 내일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마을에서 책을 빌려 와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 무언가가 가슴에서 꿈틀대었다. 나는 책 속에서 길을 발견하고 있었다. 몇 년 후 당시 농촌의 젊은이들이 활동하는 4H 서클에 가입했고 <상록수>라는 책을 모델 삼아 내가 살아갈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당시 내 가슴엔 언제나 4H의 상징인 네잎클로버가 달려 있었다. 그것은 불행했던 과거와의 작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우리 동네 가까이에 세워진 청송교도소에서 4H 서클 회장의 자격으로 재소자들에게 정신교육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가슴이 뛰어 잠이 오질 않았다. 나같이 못 배우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겨울 추위가 온전히 가시지 않은 스무 살의 3월.
나의 운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흘러가고 있었다. 높디높은 산 아래 손바닥만한 하늘만 보이는 그 곳에는 6천여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복역 중이었다. 희망의 별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그들보다 더 큰 절망을 딛고 살아온 스무 살의 나는 그렇게 삭막한 교도소 담장 안에서 첫 대면을 했다. 한 교도관의 소개와 함께 단상 위로 올라서는 나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긴장되었다. 그 곳 분위기가 그랬고 재소자들의 모습이 나를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어느덧 나는 마이크 앞에 섰고 재소자들과 눈빛이 마주쳤다. 순간 덜컹 겁이 난 나머지 마이크 앞에 선 채로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강당 안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얼마가 흘렀을까, 웃음소리가 멈춰지고 그들은 하나 둘씩 진지한 모습으로 나의 울음이 주는 의미를 되짚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입을 열고 차근차근 나의 인생 얘기를 들려주었다. 강당 안은 다시 엄숙해져 갔고 그들보다 더 많은 절망과 눈물의 길을 딛고 살아온 나를 보며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와 재소자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로 나는 교정위원으로 임명을 받고 본격적으로 교도소의 재소자들을 찾아 다녔다. 재소자들은 환경 때문에 순간의 실수로 죄를 짓고 절망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엄청난 죄목을 가진 재소자들도 만나 보면 부드럽고 연약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버려졌던 만큼, 외롭고 서럽고 절망했던 만큼 나는 자신 있게 그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강의는 늘 행복의 눈물로 끝이 났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더 깊고 더 따뜻한 가슴으로 그들을 보듬고 싶었고, 그들도 나를 끊임없이 찾았다. 굴곡 많은 삶을 살아온 우리는 쉽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고 마침내 서로 희망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점점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금 건강한 사회인으로 거듭나는 재소자들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희망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것을…. 스무 살, 아무 것도 모르던 나이에 청송교도소에 선 뒤로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앞으로도 나는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십오 척 담장 안에서 또 다른 희망을 기다리는 이들의 영원한 동반자로 말이다.
박순애-현재 의정부 교도소 교정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글쓴이는 법무부 사상 최연소 교정위원으로서, 스무 살 때 처음 청송교도소 강단에 선 이래 현재까지 재소자들의 희망지킴이로 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