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대관, 쨍하고 해 뜰 날이 다시 찾아올 겁니다” 작성자 amenpark 2013-07-16 조회 924
“나는 송대관, 쨍하고 해 뜰 날이 다시 찾아올 겁니다”
  • 취재 백은영 기자 (TV조선 문화스포츠부)
  • 사진 조선일보 DB

     

    입력 : 2013.07.13 11:21

    exclusive. 1 사기피소·집경매 송대관 인터뷰

    눈가 주름이 깊은 1946년생 남자에게도 꿈이 있었다.

    그의 꿈은 수백 억대 부채를 갚는 것이, 경매에 나온 집을 되찾는 것이 아니었다.

    밝은 웃음으로 예전처럼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여성조선] “나는 송대관, 쨍하고 해 뜰 날이 다시 찾아올 겁니다”
 
     

     

     

     

     

     

     

     

     

     

     

     

     

     

     

     

     

     

     

     

     

    “여기가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 이사 올 때 산 에어컨은 필요가 없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틀어서 아마 고장이 났을 겁니다. ‘네박자’로 돈 벌어서 이 집을 샀는데,

    처음에는 정말 좋았어요. 지금은 관리를 안 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됐지만.”

    송대관은 경매에 나온 이태원 자택 옥상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랜드 하얏트 호텔 건너편, 대사관저와 고급 단독주택이 즐비하고

    남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그의 집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 규모로 정원까지 딸린 저택이다.

    2001년 경매로 부지를 매입해 착실히

    돈을 모은 뒤 3년이라는 공사기간을 거쳐 신축했다.

    송대관의 지인은 그가 이 집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귀띔했다.

    “히트곡을 낼 때마다 한 층씩 올라갔어요. ‘네박자’가 히트하고 나서 한 층,

    유행가를 히트시키고 또 한 층 올리는 식이었죠. 인테리어 하나하나에 참 많은 공을 들였어요.

    이 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건 엄청난 고통일 겁니다.”

    현재 송대관 소유의 경기도 화성에 있는 토지도 경매 진행 중이다.

    2백억 원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그는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한 상태.

    거기에 몇 달 전에는 거액의 채무문제로 소송을 당했고,

    아내가 불법 해외원정 도박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솔직히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그런데 나니까. 이렇게 버티고 사는 거여.”

     

     

    도의적인 책임 느낀다
    앞으로 가지런히 살아가겠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힘겹게 현재 심경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보면 가장으로서 책임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작 제가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상황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한 가수이기 때문에 제가 한 일이 아닌데도

    제 이름이 먼저 알려지니까. 그런 것들이 저를 참 곤혹스럽게 하고 힘들게 해요.”

    그는 자신의 노랫말처럼 ‘세월이 약이겠지요’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했다.

    무엇보다 가족이 이런 일에 연루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가 경제적으로 힘들게 된 원인은

    2009년 충남 보령의 토지개발분양사업 인허가를 받아 건물을 신축하면서부터다.

    “저희가 사업이라고 한번 벌였는데, 그것이 실패하다 보니까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저한테 씌워진 누명에 대해 모두 해명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마음만큼은 정말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의적인 책임은 느낍니다.”

    그는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겪어야 하는 유명세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이 아닌 일들이 확대 포장되는 것이 버겁기만 하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연예인들이 유명세를 겪으면서 살고 있어요.

    그러나 정작 제가 한 게 아닌데 과대 포장되는 게 고통스러워요.

    이 자리를 빌려서 앞으로 더욱더 조심하고 가지런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송대관은 지난해 연말 찬양앨범을 냈다.

    찬송가, 복음성가 29곡을 두 장의 앨범에 담았다.

    디너쇼나 큰 행사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한 채 두 달간 녹음실에서 작업을 했다.

    “제가 3년 전에 주님과 약속을 한 게 있어요. 반드시 찬송가를 불러서 음반으로 내겠다고요.

    어느새 그 시간이 됐더라고요. 29곡을 담았지만 3천 번 불렀습니다.

    수없이 모니터링하면서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불렀어요.

    그런 노력 덕분에 많은 분들한테 진정성 있고 은혜롭게 불렀다고 칭찬을 받았어요.”

     

     
    
	[여성조선] “나는 송대관, 쨍하고 해 뜰 날이 다시 찾아올 겁니다”
     유일한 치유는 기도

    최근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그가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교회를 찾아가 기도를 하는 것이다. 기도 주제는 ‘인내’다.

    “제가 지금을 견뎌내고 있는 유일한 힘은 기도입니다. 저의 진솔한 마음을 주님께 고합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 억울하고요, 이런 건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시고 이끌어주십시오.

    제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시간만 나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이 악화된 뒤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된다고 했다.

    주말이면 찬양과 간증 요청이 많아 여러 교회에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찬송가 간증을 즉석에서 부르고 다니는데 저를 찾아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의 믿음을 전파하는 일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예전에는 찬송가를 입으로만 불렀는데 지금은 가슴으로 불러요.”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는 나의 멘토

    송대관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송영근옹에게서

    물려받은 특유의 집념이라고 했다. 송영근옹은 1919년 3월 16일

    독립운동가 김현곤, 송수련, 박지선 등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치르고

    1942년 타계했다.

    “사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부모님과 삼촌들에게 전해들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많이 내주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선조 때 굉장히 잘살던 집안이었대요.

    처음에는 자금만 대주다가 나중에는 독립운동까지 참여하셨죠. 그러다 군산형무소에 투옥되어

    갖은 고초와 고문을 겪고 집으로 돌아온 뒤 바로 돌아가셨어요.”

    송대관의 아버지 사연은 더 기구하다. 6.25 전쟁 때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생사를 알 수 없다.

    그는 아버지의 머리카락 한 줌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게 내내 안타깝다.

    “저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글쎄… 조금 서글퍼져요. 6.25 때 행방불명이 됐는데

    그때 저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사진으로만 아버지를 보았어요.

    시체를 거두지 못해 생사도 모릅니다. 끝내 아버지 사망신고를 하긴 했는데,

    지금도 가끔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명절 때 고향 선산에 가면 아버지 자리에는 묘가 없어요.

    그게 참 서글퍼요.”

     

     

    영원한 오빠로 팬들에게 남고 싶다

    그는 최근 신곡 ‘오빠가 간다’로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든든한 오빠, 멘토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았다.
    “가수는 자신의 노래에 개인적인 심정을 담기도 하고 지난 추억을 노래할 때도 있어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이 노래를 불렀어요. 저 자신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이기도 하고요.”

    그는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제 곧 배 들어오면 이제 곧 배 들어오면 고생 끝 행복 시작 이 오빠가 간다”

    이 노래는 우리가 이루려는 꿈을 만선이 된 배로 표현했다.

    이처럼 좋지 않은 소식만 들려오던 그에게 얼마 전 기쁜 일도 있었다.

    그의 노래 ‘해뜰날’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는 것.

    그는 이 노래의 작사가이자 가수로서 많은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얼마 전 공연장에 한 팬이 책을 들고 쫓아오더니 ‘송대관 씨 이거 아세요?’라고 해서 보니까

    국어 교과서더라고요. 그 팬이 책에 ‘해뜰날’이 실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책을 보고 난 뒤 집에서 잠을 못 이뤘어요. 너무도 벅차서.”

    ‘해뜰날’은 1976년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송대관이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진로 고민을 하던 때였다.

    과연 가요계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당시 저는 가수 8년 차였어요. 큰 히트곡이 안 나와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죠.

    과연 내가 가요계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나?

    이런 마음의 기로에 있을 때 이 가사를 썼어요. 이걸 써놓고 기분이 좋아서 크게 웃었어요.”

    이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사다.

    엄청난 히트곡이 될 것이라는 그의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해뜰날’은 발표 3개월 만에 1위를 차지하면서 국민가요가 되었다.

    “그해 1976년도에 수많은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있었는데 제가 10대 가수, 최고인기가요,

    최고인기가수 트로피를 거머쥐며 3관왕을 했어요.

    사실 그때 우리나라가 굉장히 어려울 때였어요.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바뀌는 때였는데 제 노래가 전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줬죠.”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 “사람 마음이 참 중요하더라고요.

    어느 정도 상처가 정리되고 마음이 차분해지면,

    그때 제 웃음을 되찾아서 멋있는 송대관이,

    대찬 송대관이 다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 영원한 오빠의 모습을 보여줄 거예요.”

    송대관의 인생에 진짜 해 뜰 날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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