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6월28일 새벽에 한강철교 폭파의 굉음이
우리의 피난길을 재촉하게되었다.
그당시 우리 피난길에 오른 식구는 모두 여섯식구로
우리 형님내외와 조카, 그리고 우리누이,
그리고 형님의 처제, 마지막으로 나
이렇게 여섯식구가 피난길에 올라 한강을 조각배에타고
사경을 무릅쓰고 올라타 기적에 가까운 도강에 성공하여
과천으로 해서 용인을 거쳐 수원에 도착하여
거기서 하루를 종로교회 (정등운 목사님 사택)에서 하루밤을 자고
기차에 올라 곧바로 부산을 일주일이나 걸려 도착하게 되었다.
거기서 동대신동교회에서
피난교인들만 수용하게되어 말할수 없는
처참한 생활을 하게되었다.
다시 피난민이 작은 도시 부산에 집중하게 되어
마산으로 소개령을 내려 마산에 가서 며칠을 있다가
다시 인민군의 압박으로 마산이 위태로워서
다시 부산으로 무개 화물선을 타고
배멀미로 온갖 고생을 겪으며 부산으로 회귀하여
부산 항서교회에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9.28수복으로 서울에 상경하여
파괴된 집을 움집을 짓고 살다가 생계수단으로 엿장사도 하고
어린 나이에 갖은 역경을 다 경험하게되었다.
다시 1.4후퇴시에
역시 기차로 영등포역에서 기차 지붕위에 올라타고
영하28도의 강추위에 일주일이나 지나 대구에 도착하여
대구 동대신동교회로 기억난다.
거기서 며칠을 머물다가 동인동276 한해동 씨댁에서
여섯식구가 콘크리트바닥에서 그 추운 겨울을 나게되었다.
발은 동상이 걸려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치료하여 동상이 낳게되어
피난학생을 수용하여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게 되어
대구상고에 등록하여 감나무밭에서 새끼줄을 치고 반편성을하고
거기서 어렵게 공부를 하게되었다.
그래서 대구는 잊을 수 없는 고장이 되어
지금도 문득 문득 생각이 나곤한다.
거기서 신문팔이도 하여 그당시 경향신문이 대구에선 인기가 있어서
경향신문과 대구매일신문, 영남일 보 등등의 신문을 팔면서
공부도 하고 생계의 일환으로 고생하게된 기억이 난다.
대구장로합창단의 눈부신 활약상을 보면서
새롭게 생각이 나서 반갑기도하고
옛날의 기억이 나서 여기에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본다
문맥이 맞지 않아 취소할까도 생각하다가
졸작품을 여기에 싣게 되어 아량있기를 바란다.
-☞원형연(서울삼양감리교회 원로장로)/989hyu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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