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신, 귀신, 병신, 작성자 김영철(T1) 2006-05-04 조회 966
* 저가 근무하는 대구사이버대학교의 외래교수(전 대구적십자병원장: 정신과 의사 권영재)가 저희 대학교 홈페이지에 올린글입니다. --------------------------------------------------------- 내가 대학병원서 수련의를 할 무렵에는 인턴 별명(別名)을 삼신(三身)이라고 불렀다. 밥 먹을 때는 걸신(乞身), 눈치 보는 데는 귀신(鬼身), 일할 때는 병신(病身), 내가 이런 삼신(三身)중에서도 고수(高手)의 노릇할 때의 일이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인턴이 되고 첫 근무지가 하필이면 응급실이 왼 말인가? 초장에 이과, 저과 다니면서 무엇을 좀 배우고 나서야 겨우 응급실 근무가 가능할 것인데 나는 아예 첫 출발을 응급실부터 시작을 하게 되었으니 불행도 이만한 불행이 없었다. 하긴 그 응급실도 내가 졸업한 대학의 부속 병원이므로 어려운 환자 오면 언제든지 선배의사나 교수를 부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부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지 막상 아무 조치도 해놓은 것 없이 모른다고 무조건 선배를 부른다는 것은 스스로의 목숨을 단축하고자 하는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이런 저런 검사도 해놓고 최소한 환자가 죽지 않을 정도의 응급조치를 한 다음에 도움을 청해야지 무턱대고 불렀다가는 나중에 돌아오는 보복은 끔찍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죽으려고 음독한 환자가 들이 닥쳤다. 간호사가 묻는다. “선생님 그로브(고무장갑)는 얼마짜리로 드려요?” 요즘 같으면 “칠 반으로 주쇼.”하면 될 것을 그때는 내손에 맞는 장갑의 사이즈를 모르니까 아무거나 내손으로 골라 낀다. 이제는 고무호스를 환자의 코를 통해 위장으로 넣어야 하는 순서인데 “선생님 엘 튜브는 얼마짜리로?”하고 또 묻는다. “되게 질문이 많네, 아무거나 주면 될 텐데(속으로 욕하면서) 또 묵묵부답이다. 이때 ”16프린치로“하고 명령했으면 오죽 폼이 나겠냐만 뭘 알아야 면장을 하지. 소주병을 깨어 제 팔을 그어 피를 줄줄 흘리는 양아치가 왔다. 또 묻는다. “실크는 얼마짜리로 하시겠어요?” “4-0 로 준비하시오”라고 하면 되었겠지만 또 할말을 잃고 내손으로 봉합사를 고른다. 겨우 겨우 찢어진 피부를 다 꿰매고 나니 이제는 교통사고로 얼굴이 찢어진 환자가 들이닥친다. 이제는 이미 경험한 것이 있는지라 나는 자신 있게 “실크 4-0 로 준비하세요!”하고 지시했는데 웬걸 간호사 냉큼 달려가 준비를 할 생각을 않고 “네? 뭐라고 하셨어요?”하고 나의 얼굴은 빤히 쳐다본다. “재수 없게 남의 얼굴은 왜 째려보는 거야?” 하고 시비를 걸고 싶지만 참고 있다. 간호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블렉 실크로 준비할게요.” 나중에 알았지만 몸통이나 사지의 피부가 찢어졌을 때는 좀 질기고 굵은 4-0 실크를 봉합사로 쓰지만 얼굴의 상처는 흠을 최소한 줄이기 위해 특수하게 만들어진 검은 실(블렉 실크)로 촘촘하게 기워줘야 한다. 그런데 그 때는 그런 걸 몰랐으니 정말 병신이다. 약 빠른 나의 친구들은 인턴 근무가 시작되기 전부터 응급실이나 병실에 와서 밤 세워가며 선배들의 “시다바리”를 해주고 약과 기구의 이름을 외우고 또한 각종 실기를 연마하였다. 그리고 그 것도 모자라 과거 선배들이 메모해둔 공책을 빌려서 달달 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이 친구들은 인턴이 되자 말자 간호사에게 이런 저런 명령도 잘 할 수가 있었고 또한 환자에 대해서도 비교적 능숙한 의술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이 그렇게 의사로서의 예습을 하는 동안에도 그런 잡기(雜技?)는 소인배들이나 뭘 모자라는 작자들이나 하는 짓거리들이다. 그까짓 것들이야 가만있어도 때가 되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남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잡기를 연마하는 동안에도 나는 “신동아”나 “창작과 비평” 혹은 “문학사상” 보거나 혹은 세계문학 전집을 섭렵하며 진정한 인술을 가진 의사의 도를 닦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달려온 “맹장염(盲腸炎)” 환자, “조기파수(早期破水)”로 출산이 절박해서 온 산모, “심근경색(心筋梗塞)”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환자, 공사장에서 추락하여 머리통이 깨어져 온 인부, 눈에 헛것이 보이고 귀에 환청(幻聽)이 들려 난리굿을 하는 “정신병” 환자 등등이 응급실에 가득하다. 피바다와 악다구니와 통곡이 밤새 뒤섞이는 응급실, 여기서는 내 존경하는 “토스토 에프스키”도 필요가 없었고 내 사랑하는 “존 스타인백”도 무용지물이었다. “스땅달”이나 “토마스 만”, “나쓰메 소세키”도 다 말짱 헛것이었다. 독약 먹은 사람 치료는 “위세척(胃洗滌)”을 먼저 하여야 하고 다리 부러진 사람에게는 일단 “부목(副木)”부터 대주어야 한다. 숨넘어가는 사람에게는 “산소(酸素)”요, 심장마비 환자에게는 “에피네프린”주사가 딱 일 뿐이었다. 내가 학생 때부터 초지일관 정신과를 고집하여 인간 질환의 기계적 검사와 고식적인 주사와 약물치료를 멸시하였다가 이렇게 막상 의사되어 임상에 서니 삼신 중에 최고의 삼신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선생님 Glove(고무장갑)는 칠 반이면 좋겠죠?”, “예” “저 환자는 얼굴 상처니까 Black Silk(검정 봉합사)로 촘촘히 Suture(기우면)하면 어떨까요?” “예” “ 음독환자의 상체가 길어 뵈네요. L-Tube(고무호스)는 16으로 준비할까요?” “예” “혼수상태 같죠? Nelaton(도뇨관)부터 준비해드려요?” "예“ 미스 연은 질문하고 나는 무조건 "예'라고만 대답한다. 그리고 준비되면 로보트처럼 일한다. 나는 내손에 맞는 장갑의 크기, 상처 봉합시의 실의 종류와 굵기, 혼수환자의 응급처치 등등은 응급실 수간호사인 미스 연이 나에게 일일이 가르쳐 주어 알게 되었다. 멍청한 환자나 보호자는 내가 과묵한 경상도출신 의사여서 그런 줄로 알았겠지만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응급실 수간호사에게 배우고 또 배우는 삼신중의 최고봉임을 잘 알았으리라.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인턴 숙소에 돌아오면 매일 밤 침대에 수술실을 걸쳐놓고 잡아매고 묶는 실기를 연습하였다. 매듭위에 정확하게 가위질하는 방법도 익히고 틈만 나면 응급환자처치 요령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내년부터 평생 정신과의사 노릇만을 하게 되니까 이 짓들이 다 쓸모없는 잡기(雜技?)가 되겠지만 나의 스승 미스 연을 실망시킬 수만은 없지 않겠나? 각고(刻苦)의 노력이 열매를 맺었다. 인턴이 끝날 무렵에는 인턴 중에는 가장 수술을 잘하는 의사가 되었고 이윽고 외과에서 레지던트로 입국(入局)하라는 제의를 받게까지 되었다. 드디어 삼신(三身)중에서도 최고봉에 있던 나의 타이틀이 일신(一身)혹은 이신(二身)계급으로 강등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최고의 인기 과였던 일반외과에서 교수에게 스스로 입국을 권유 받았다는 것은 나로서는 사실을 굉장한 영광이었다. 하지만 이런 영광을 초개(草芥)처럼 뿌리치고 초지일관 정신과로 당당하게 나아갔다는 사실 또한 나로서는 정말 멋있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인생은 일장춘몽. 어는 덧 세월 흘러 초짜 의사생활을 돌이켜 보니 저게 정말 나에게 있었던 사실인가? 아니면 창조한 신화인가? 싶다. 오랫동안 이토록 수많은 나의 스승과 친구들에게 신세만 지고 그러나 항상 배은망덕하게 살고 있으니 이게 정말 내가 그토록 추구했던 수양된 인간 맞는가? 하는 회의(懷疑)도 든다. 이럴 때 또 한번 나를 지도해 줄 훌륭한 선생이 나타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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