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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1908∼1932)의사의 처형 장면 공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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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menp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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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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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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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의사의 처형 장면 공개 -한국장로성가단 홈피에서 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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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의사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은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이다.
윤 의사의 무릎을 꿇린 채 처형함으로써 일제가 윤 의사의 기개를 꺾으려했던 점,
총탄이 너무나도 정확히 윤 의사의 이마를 관통해 오히려 피가 별로 흐르지 않은 점 등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처연하게 만든다.
지난달 초 일본 방위청 자료실에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실린 이 사진을 발견한
‘더 채널’의 김광만(金光萬) 대표나 신운용 근현대사 팀장,
이 사진 사본을 전해 받은 유족이나 윤병석(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의 첫 반응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윤 의사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이 처음 발견된 데다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고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탐험좀 하다가..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숙연해 지더군요...
윤의사님 덕분에 독립군은 당시 중국국민당 장제스정부의 지원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국가를 위한 숭고한 희생앞에 감히 무릎을 꿇지 않을수가 없군요.. 제가 너무 좁게만 생각하고 살아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어쨋든..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한번씩 생각해 주셨으면 해서 퍼왔습니다..
<<파란만장 뉴스>>에서
Pie Jesu / Weber / Johann & And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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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진 |
09-28 |
이 시화 장로님보다 단 한살 위의 尹 의사
1932년 당시 단 25세의 조선 남아가..
일본에 처형당하기보다, 패망한 조국이 그를 사지에...!!?
1969년 7월 우리가 상해 홍구 공원에서 그저 관광기념 촬영에
엄벙덤벙....!
오늘, 意味深長한 자료에서 그 시대와 그를 새삼 뒤돌아
봅니다..!!!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의사의 연 보 (年 譜)
1908. 06. 21: 충남 예산군 출생
1914. (7세): 천자문을 외우고 동몽선습 학습
1918. (11세): 덕산공립 보통학교입학
1919. (12세): 3.1 독립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고 보통학교 자퇴
1921 (14세):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
1926. (19세): 오치서숙 한학수업 마침, 「매헌(梅軒)」
아호를 얻음, 농촌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 시작
1930.3.6(23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유서를 남기고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1931. 5. 8 : 중국 청도에서 배편으로 상해로 옮김
1931. : 한인공우회 조직하고, 노동야학 및 노동운동
1931. (24세) :
김구, 이유필, 최동오, 김현구, 김의한, 김두봉, 박창세,
안공근등과 독립 운동
1932.4.26(25세):
대한민국 14년에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백범 김구선생과 기념촬영
1932. 04. 29 :
11시40분(한국시간 12시40분) 상해 홍구공원의거,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이하 중국 침략의 군관민 수괴들을 응징
1932. 5. 25 :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1932. 11.18 :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
1932. 12.19 : 아침 7시40분(25세):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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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도 |
09-28 |
대장합 홈피- '휴게실'로 원문과 사진, 그리고 정명진 장로님의 댓글까지 몽땅 퍼갑니다. 죄송...
암울한 그 시대엔 나라 위해 이토록 숭고하게 목숨까지 바친 분이 계셨건만, 지금엔... -대구/큰 머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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