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 첫 개회를 기도로 시작함 작성자 순례자 2007-04-27 조회 2128

대한민국 국회 첫 개회를 기도로 시작함 (1948. 5. 31)

 

   

1948년 5월 10일에는 한국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유엔 한국 위원단의 감시하에 선거가 가능한, 한국의 인구 3분의 2가 살고 있는 남한 지역에서 실시된 것인데 유권자의 94%가 등록하고 95.5%가 투표에 참가하였다. 한국 위원단은 6월 25일 대체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선거가 실시되었다고 결론을 내리었다. 리승만은 이 선거에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하여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전국에서 948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한 이 선거의 정당 및 사회 단체별 당선 상황을 보면 무소속 85명,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55명, 한국 민주당 29명, 대동 청년당 12명, 그 밖의 정당.사회 단체가 13명이었다.160) 선거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김구.김규식의 협상파에서는 일부가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였었다. 이 선거 결과를 보면 김구와 김규식이 남한의 선거가 한국 민주당이 혼자 차지하게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 기우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리승만은 제헌 국회가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세우는 일이 당면한 문제이며 토지 개혁과 국방군의 조직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5월 26일 기자 회견에서 김구와 김규식이 새로운 정부를 지지할 뜻을 표명한다면 그들과 함께 일할 생각이라고 말하였다.161) 그러나 협상파의 두 지도자는 계속하여 남한의 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남북 요인 회담을 다시 열어 4.30 성명을 실천하려고 하였다.162)

 

국회가 열리기에 앞서 입법 의원과 민주 의원은 그 임무가 끝날 것을 선언하고 5월 20일과 29일에 각각 폐원식을 가졌다. 이것으로 군정 하의 입법기구와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비상 정치회의 소집으로 비롯된 민주 의원은 각각 그 기능과 국가 건설의 임무를 새로 구성된 제헌 국회에 인계하게 되는 것이다.

 

5월 22일에는 리승만이 국회 의원 당선자 40여명을 모아 제1차 국회 준비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27일에는 제2차 회의를 열었다. 5월 31일에는 한국 역사상 첫 국회가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이 날 오전에 임시 의장으로 사회를 맡게 된 리승만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윤영 의원을 시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그는 이 회의에서 재석 인원 198명 중 188표로 의장에 당선되어 오후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개회사를 하였다.

 

"우리가 오늘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는 애국 선열들의 희생적 혈전한 공적과 세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과 국련의 공의상 원조를 깊이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민국은 기미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 대회를 열고 대한 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 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 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즉 기미년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 정부의 계승이니 이 날이 29년만에 민국의 부활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 민족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 정부는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 정부임을 이에 또한 공포하는 바입니다.....

 

우리 이북 5도 동포가 우리와 같이 공선으로 대표를 선정하여 우리와 이 자리에서 원만히 합석치 못한 것은 우리가 극히 통분히 여기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북에서 넘어온 4백 50만 이재 동포가 우리 선거에 참가하였고 피선된 대표도 여러분일 뿐 아니라 이 국회에 자리를 상당한 수효대로 비어 놓아 하루바삐 자유선거로 이북 대표가 와서 이 자리를 점령하고 우리와 함께 직책과 권리를 분담하여 완전 무결한 국가를 회복하도록 준비하리니 우리는 이북 동포와 합심 합력하여 미국과 국련의 협조로 통일의 조속 성곡을 재래하기를 결심할 것이며 또 다시 맹서하는 바는 우리 민족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이오 우리 강토는 일척일촌이라도 남에게 양여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이 국회의 최대한 목적은 이미 세계에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주의를 토대로 한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정부를 수립하고 국방군을 조직하여 안녕 질서와 강토를 보장하며 민생 곤란을 구하기 위하여 확고한 경제 정책을 공평히 실시할 것과 개인의 권리를 국제상 교섭으로 보호할 것과 교육을 향상하며 공업을 발전하며 평등호혜의 조건으로 해외 통상을 열것과 언론, 출판, 집회, 종교 등 자유를 보장할 것과 국제상 교의를 돈목하여 세계 평화를 증진 할 것과 소련과 교제를 열어서 양국의 중대 관계를 시정 할 것과 길이 열리는 대로 일본과 담판을 열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문제를 타정할 것 등이니 우리 국회의원들의 책임이 중대하고 긴박합니다.....163)

 

우리는 이 개회사에서 리승만 국회 의장이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경건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국회가 처음 시작될 때 이윤영 의원을 시켜 기도를 하게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의 조국이 열강의 각축 속에서 망해 버리고 오랜 독립 운동 끈에 해방을 맞아 다시 3년간을 투쟁하여 독립을 회복하는데 있어 리의장은 첫째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악독한 침략 아래 우리 나라가 지도에서 말살되고 민족의 희생이 영원히 불가능하게 보였던 암흑 시대를 독립 운동으로 이어온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독립을 찾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리 의장은 국회 개원식에서 그동안 자기와 사이가 나빴던 하지 중장을 가리켜 "오늘 국회가 개회되기까지 가장 노력한 분이 하지 중장으로 가장 기뻐할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소개하여 그를 기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 개원식에 참석하고 있던 서재필을 단상에서 축사를 하도록 요청하여 독립 운동의 선배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리승만이 이 식사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역사적이며 민주적인 정통성이었다. 그것은 1919년 3.1운동 후 서울에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13도 대표가 모여서 조직한 한성 임시 정부의 법통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이어 이 국회에서 탄생할 새 정부, 즉 대한민국 정부가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권 회복은 독립 운동의 소산이며 따라서 군정 3년 간의 민족 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자율적 정부 수립 운동이 독립 운동인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민주적으로 구성되어 주권을 회복하게 된 이 국회가 전 민족을 대표한다는 것과 이 국회에서 탄생될 정부가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 정부라고 한 것은 앞으로의 통일과 국제 승인을 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북 5도의 동포들이 하루바삐 자유 선거로 대표를 뽑아 국회에 보내 주기를 바랐다. 이것은 북한이 자유선거로 통일 되기를 바라는 그의 희망의 표시였다. 그는 또한 이 개회사에서 국회가 추진해야 할 여러 가지 정책을 언급하며 미 주둔군은 우리 국방군이 준비될 때까지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164)

 

국회는 곧 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헌법 기초 위원회가 구성되고 전문 위원이 정해지면서 헌법의 초안이 토의되었다. 전문 위원들을 모두가 일본의 헌법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한국 민주당원이 위원장인 헌법 기초 위원회는 유진오 전문 위원 등 한민당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 형태를 의원 내각제로 하는냐 대통령제로 하는냐 하는 것은 권력 구조상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기초 위원회는 일방적으로 내각 책임제를 채택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모두가 리승만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생각하던 이때 대통령을 아무 권한도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려는 계획이기도 하였다. 리승만은 프랑스의 예를 들어 내각 책임제로서는 정치적 안정을 기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165) 그러나 기초 위원회가 계속 내각 책임제를 고집하게 되자 리승만이 강력하게 이에 반대하여 대통령제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6월 23일에는 단원제, 대통령제의 행정부, 3권 분립주의, 농지의 분재 등을 골자로 한 헌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국회 내에는 11명 정도의 좌파 의원이 있어 약 30명의 다른 의원과 함께 헌법의 심의를 지연시키고 있었다.166) 리승만은 직접 의사봉을 쥐고 헌법 제정을 서둘러야 했다. 그는 9월에 파리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는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를 보내려고 그 이전에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리승만은 농지 조항을 심의할 때 한민당이 반대할까 염려하였는데 그들은 이 조항이 통과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7월 12일에는 대한민국 헌법이 국회를 완전히 통과하여 7월 17일에 공포식을 가졌다. 리승만은 이 식에서 헌법에 정식으로 서명하여 공포를 하고 이북의 동포들도 하루바삐 기회를 얻어 이 헌법의 보호를 다 함께 받게 되기를 축도하였다.167)

 

이 헌법은 7월 16일 국회를 통과한 정부 조직법과 함께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되었는데 이에 따라 7월 20일에는 국회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의 선거가 있었다. 리승만은 196명 중 180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부통령에는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24일에 있게 된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는 정부를 조직하는데 중요한 것은, 첫째는 일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야 하고 둘째는 이 기관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후 일반 국민은 내 집을 사랑하고 보호하듯 새로운 국가를 만년 반석 위에 세우자고 말하였다.168)

 

이제 정치인들과 국민은 누가 국무총리가 되느냐 하는데 관심이 쏠려 있었다. 사실에 있어 대통령 책임제 아래서 국무총리는 실권이 없는 것이지만, 행정부의 제2인자인 이 직책을 바라는 사람은 많았다. 해방 후 미 군정에 밀착하면서도 리승만의 정치 노선에 동조해 온 한민당의 김성수가 그러하였고 부통령인 이시영은 임정측의 조소앙을 추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소앙은 남북 협상으로 북한에 다녀온 후 아직도 자기의 노선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민당과 한독당 사이의 갈등은 어느 한쪽을 택하여도 국내 정국은 분한이 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만식과 일해 온, 북한민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였다. 별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윤영이 국회의 인준을 받지 못하게 되자 리승만은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을 지명하여 인준을 받았다.

 

리승만은 내각 구성에 있어 김성수를 재무장관에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이 자리를 원하지 않았고 한민당 출신이 내각에 많이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야당의 길을 택하여 리승만에 대항하였다. 리승만의 일할 수 있는 정부의 조직이라는 실질주의와 아직도 지위의 고하에 가치 기준을 두고 있는 명리주의 간에는 서로가 이해 못 할 부조화가 있게 마련이었다.

 

해방된 지 꼭 3년이 되는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는 대한민국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 식전에는 맥아더 장군이 참석하여 국가의 앞날을 축하해 주었다. 리승만은 대통령 식사에서 건국의 정신으로 민주주의 신봉, 인권과 개인 자유 보호, 언론의 자유, 상호 이해와 협조, 노동자 및 농민들의 생활 향상, 경제 발전, 노사 협조, 국제 친선과 경제 협력, 국민된 충성심과 책임 등을 강조하였다.169)

 

 

주;

160)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국회의원상황> 1963년, pp. 69-71.

161) Rhee-Oliver Correspondence, May 26,1948 June9.1948.

162) Insoo Rhee, op. cit., pp.289-290.

163) <자료 대한민국사> 7, pp. 193-194.

164) 위의 책, pp.188-196.

165) Rhee-Oliver Correspondence, June 26, 1948.

166) Ibid.,July 5.1984.

167) 유진오, <新稿憲法解義>(서울 : 일조각, 1959), ㅔㅔ.25-30.

168) <자료 대한민국사> 7, pp.626-630.

169) 위의 책, pp.816-821.

 

 

*그림설명(위로부터)

 1. 5.10 선거에서 투표하는 리승만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

 

미국 대통령 취임선서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시작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아마 무신론 대통령도 꼭 그렇게 취임선서하도록 괸례화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저리 강대한 나라가 되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신 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첫 국회를 기도함으로 개원해서 정치, 경제, 사회가 이만치 복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정치는 아니라고요? 그후에 기도로 개원한 대통령이 없어서 정치는 이 모양인가 봅니다. 다른 분야는 잘 되어 가고 있지요? 복 받은 나라가 분명합니다. 북한은 잘 되는 것에 대한 가시로 남아있지만 그래서 기도하게 됩니다.  -동산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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