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느티나무 / 김준기
• 전병욱 목사...
이메일을 체크하기 위해 인터넷을 접속하는데, 뉴스 검색어 1위에 전병욱 목사의 이름이 올라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용을 보니, “여신도 성추행 혐의를 받아왔던 서울 용산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가 성추행을 시인하며 공개적으로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이고, 이에 따른 각종 댓글들, 특히 안티기독교인들의 조롱과 입에 담을 수 없는 비난들이 기막힐 정도로 달려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에 관한 추문은 이미 여러 경로로 들어서 알고 있었고, 지난 9월 “목회자의 성적 범죄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해보는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실명이 포털사이트에 오르는 모습을 보니 이젠 부끄럽다 못해 인간의 죄성이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대개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며 양비론적 입장에다 오히려 용기 있게 고백한 그를 대단한 사람인 양, 칭송하기까지 하는 반응이고, 또 하나는 냉정하고 차가운 반응입니다. 저는 두 반응 다 마땅치 않습니다. 우리가 죄 없으신 예수님도 아닌데 남의 잘잘못에 대해 정죄하고 비난할 권리는 분명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엄연히 죄된 행위에 대해 침묵하는 것도 온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
저는 전병욱 목사가 우리보다 특별히 성적으로 더 호색한(好色漢)이라거나, 더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발각되지만 않았을 뿐이지, 죄로 따지자면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원인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앞길이 창창하고 유망한 목회자를 망가뜨리고,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손상시키는 것일까요? 위용을 자랑하며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도 거슬러 올라가면, 작은 옹달샘이 근원이듯이 이러한 성적인 범죄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사회에 만연된, 그리고 이미 비뚤어지고 둔감해진 성적 가치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1. 포르노가 일상이 된 사회
얼마 전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값을 지불하다가 카운터에 쌓여있는 파일다운로드 쿠폰을 한 장 얻어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소개받아 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있는 터라 잘됐다 싶어 돌아와 쿠폰에 기록된 주소로 들어가 회원등록을 하고 영화를 검색하여 보니 온통 포르노 동영상들이 낯 뜨거운 제목들과 함께 올려져있었습니다. 쿠폰에 이미 공짜로 부여된 포인트만으로도 이런 음란동영상은 수십 개 다운로드를 하고도 남을 터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IT 강국이라는 우리나라는 포르노 사이트 접속률 1위의 국가입니다. 어린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김길태의 경우도 체포당시 포르노 영상물을 수십 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저는 요즘 하루가 멀다고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는 입에 담기도 더러운 근친상간의 범죄나, 성폭행의 범죄들, 그리고 그 범인들의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포르노물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2. 막장 드라마에 면역이 된 사회
어릴 적 외가댁 화장실은 마당 한쪽 구석에 자리한 푸세식(?) 화장실이었습니다. 처음에 들어가면 구린내가 진동하며 숨이 막힐 정도로 암모니아 냄새가 끔찍할 지경이었지만, 차츰 익숙해지면서 구린내도, 암모니아 냄새도 느끼지 못하고 쪼그려 앉은 발이 저릴 정도로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오곤 했습니다. 죠지 바너(George Barner)의 “주전자속 개구리”(The Frog in the Kettle)는 죽음을 부르는 익숙함의 함정이라고나 할까요...?
저희들이 자랄 때는 연인들의 애정 씬이 나오는 TV드라마의 한 장면은 결정적인 순간,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다른 화면으로 바뀌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입술이 닿는 실제 키스장면은 보통이고, 아예 클로우즈업까지 해가며 장장하게 비추어줍니다. 어린 자녀들이나 어르신들과 함께 일가족이 TV를 시청하기에 민망할 정도의 장면들, 평범한 가정이라면 말도 안 되는 패륜적인 이야기들이 소위 막장 드라마라고 예사로 흘러나옵니다. 여가수들은 핫팬츠를 넘어 아예 몸매를 다 드러내는 비키니 수영복 차림으로 나와서 선정적인 율동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된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의 시청률을 끌기 위해 동원하는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자극적일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로 치러야 할 사회적 댓가는 치명적입니다. 은연중에 사람들의 도덕 가치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3. 돈으로 성(性)을 살 수 있는 사회
전국 33만7천여 개의 식품공중접객업소 가운데 절반이 넘는 17만1천여 업소에서 '성적(性的)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고 이 성적 서비스에 종사하는 여성은 65만여 명에 이른다는 믿을 만한 조사 결과가 꼭 20년 전인 연합뉴스 1991년 11월 5일자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숫자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매춘을 하는 여성들은 속칭 “영계”로 일컬어지는 어린 여자들로 대개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많고, 대부분 30세 이하의 여성들입니다. 그런데 2009년 인구조사 통계표에 의하면 20~30세까지의 여성이 300만 명 정도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거리를 오가는 20~30세까지의 젊은 여성의 다섯 명 중 한명은 비율상 성적 서비스에 종사하는 여성이라는 말이 됩니다.
“매매춘? 남자가 뭐 그럴 수 도 있지... 그리고 어느 국가 어느 역사를 막론하고 남성들의 성적 욕구 분출을 위한 돌파구는 있기 마련이고, 매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인데(창세기 38장에 이미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매춘녀로 착각하여 관계 맺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차라리 공식적으로 매춘을 양성화 하는 것이 성범죄율 감소에 필요한 필요악이다.”라는 억지 논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죄책감도 없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나라는 해마다 낙태로 죽이는 아기들이 100만 명이 넘으며, 낙태의 통계가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가장 많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중국 다음으로 공식적으로는 낙태율 1위의 국가입니다. 인구 비례로 볼 때, 독일의 20배,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11배, 일본의 9배, 미국의 6배에 달합니다.
■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너무 “값싼 동정”과 너무 쉽게 용서를 하는 일에 익숙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성적 범죄들은 마치 수면아래 가라앉아 있는 덩이가 더 큰 빙산처럼 겉으로 드러난 현상 외에 사회적으로 깔려있는 성적 가치개념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은 단 순간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몇 세대(generations) 이상을 두고 바꾸어 가야하는 길고 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나부터...
모든 변화의 중심축은 “나부터”입니다. 나는 ‘바담 풍’ 하면서 너는 ‘바람 풍’ 하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도 없고,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건전치 못하고 정당하지 않은 음란물들을 나부터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겉으로는 아주 신실해 보이는 많은 목회자, 교회의 중직자들이 포르노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수십 년간 목회를 해오며 교세도 큰 어느 중형 교회의 목회자가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된 포르노 영상물과 관련하여 불명예스럽게 목회를 접어야 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을 사용하며, 글을 쓰는 네티즌들 치고 포르노 물에 한번 쯤 노출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봅니다. 저희 교회 청소년들에게 “너희들,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포르노 영상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아무도 없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우리나라의 요즘 현실입니다. 남 말할 것 없습니다. 이 더러운 것들을 나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2. 경건 생활의 일상이 되도록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시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전병욱 목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그의 특유의 언변과 태도는 분명 청년들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의 근간이 되는 성경 해석은 이미 많은 부분 말도 안되는 자의적인 해석에, 세속적이고, 성공 지향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동안 지적되어 온 것입니다(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너는 그보다 능력이 많기를 하냐, 교회가 크냐, 설교를 잘하냐 하고 반발하실 분도 틀림없이 있으리라 예상됩니다만, 저는 이런 면에서 일반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외에는 우리의 삶을 바꿀 대안이 없습니다.
교회의 각성과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외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돌아오는 일들이 중심축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살아나갈 방향을 잡는 경건 생활이 일상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교회의 지도자들이 중요한 목회적 가치로 여길 때 교회는 깨어나며,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3. 기독교 가치관을 가지고 각계각층에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방송 분야에 근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선자로 방송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모든 방송을 “기독교”라는 종교 방송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거니와 또 그래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건전한 사회인으로써 바른 가치를 심을 수 있는 깨끗한 방송을 할 수 있겠지요. 적어도 기독교인 방송 PD라면 근친이나 불륜, 불건전한 성충동을 조장하는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을 연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 감시기능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가 터지면 와글와글 떠들지만, 이내 식어버리고 잊어버립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감시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회 전체가 갖고 있는 왜곡된 가치를 바꾸는 일은 몇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의 원조교제나, 성매매와 같은 것들은 단속기간에만 고발할 것들이 아닙니다. 이건 범죄행위입니다. 함께 일소(一掃)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포르노 사이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사람의 파수꾼이 도둑놈 한 사람 잡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자라나는 독버섯들처럼 이런 것들은 발견하는 즉시 신고하고, 고발해야 합니다. 내 어린 자녀가 봐서는 안되는 것들은 모두 해악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과 사임 문제는... 전병욱 목사의 죄나, 그럼에도 고백한 그의 용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작게는 삼일교회 공동체의 상처이며, 나아가 친히 피흘려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The church)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의 상처입니다.
조롱하는 자들이 개떼들처럼 달려들며 교회를 향하여 침을 뱉고 돌을 던질 때 그 침 뱉음과 돌을 고스란히 맞고 계시는 분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어설픈 값싼 동정으로 쉽게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6:1-5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같은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옮겨 보겠습니다.
갈 6:1-5(1)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했다면 성령님을 따라 사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그런 시험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2) 여러분은 서로 짐을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실천하십시오. (3) 아무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4) 각자 자기 행위를 살피십시오. 그러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도 자기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5)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중대한 범죄가 발생하면, 용서하기에 앞서 할 일은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큰 짐들을 서로 질 뿐 아니라, 자신이 감당해야할 자신의 짐, 책임은 자기가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 용서부터 거론하는 것은, 마치 자기 혼자만 가장 인정이 많은 양, 마음이 착한 사람인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 공동체를 망치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이번 전병욱 목사의 일은, 그리고 유사한 많은 사례들이 우리 교회가 아니니까 하면서 그동안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시간이 흘러가면 잊혀질 지 모르겠습니다만,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다시금 교회의 거룩성과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뼈를 깎는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 글 ; 황대연 / 한가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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